여행 전날까지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그 사이 보리가 옆에서 참견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마음 한켠이 짠했다. 아시아나 항공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라운지를 이용해 보니 대한항공 라운지보다 한결 더 마음에 들었다. 시애틀행 비행기도 한산해 여유롭게 앉아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매번 찾아오던 그날이 또 겹쳤는데, 기내 압력 때문인지 이번엔 난생처음으로 통증이 전혀 없었다.

시애틀에 도착한 건 새벽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지만,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른 탓에 체크인은 할 수 없었다. 장거리 비행을 마친 직후라 다른 곳을 돌아다니기엔 힘이 부쳐, 숙소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숙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가까이에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있어 걸어가 보았다. 시장을 구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타벅스 1호점 앞도 지나치게 되었고, 이곳만의 활기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장에서 간단히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와 직접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예전부터 그레이스 아나토미를 보며 시애틀을 동경했다. 특별히 어떤 명소를 찾아다니고 싶다기보다는, 이 도시가 가진 공기와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숙소 창가에서 내려다본 어제의 퇴근길 고속도로 풍경, 그리고 오늘 하루 걸어온 길들이 마치 내가 상상하던 낭만을 그대로 재현해 주는 듯했다. 회색빛 도시가 이렇게 감성을 자극할 줄이야. 스스로도 웃음이 났다.
오늘은 시애틀의 다양한 공간들을 찾아가 보았다. 먼저 뮤직 익스피리언스 뮤지엄에서 너바나와 지미핸드릭스, 사운드가든, 펄잼 등.. 내가 좋아하는 전설적인 시애틀 출신의 전시를 보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치훌리 가든 앤 글라스에선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 처음 보았던 그 화려한 유리 예술이, 압도적인 작품의 양 때문인지, 웅장하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우연히 시애틀 대학교에 들렀다. 아마존 서비스를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이어졌는데, 저녁 무렵의 캠퍼스 공기는 상쾌하고 평화로웠다.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익숙한 여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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