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남편이 스코틀랜드에서 습하고 매서운 찬바람을 제대로 맞고 왔다고 한다. 여행 내내 라디에이터를 틀어놓고 버텼다며 감기 기운까지 보여, 결국 내 생명줄 같은 가습기를 남편에게 양보했다. 따뜻한 한식이라도 먹으면 컨디션이 돌아올까 싶어 새벽부터 오이 된장무침과 김치찌개를 끓였다. 배달음식을 시키며 모아둔 한식 양념 소스들이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우리는 맛있게 아침을 먹었지만… 아마 온 동네에 김치찌개 군내가 퍼졌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아스널 경기 시작이 지연되는 바람에 남편은 결국 경기를 보지 못한 채 영국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함께 보낼 이틀 동안은 남편이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다. 나는 내심 셰필드나 울버햄튼으로 경기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남편은 장거리 이동을 원치 않아 가까운 리버풀로 가자고 했다. 차도 있으니 나도 잘 됐다 싶었고. 오늘은 맨체스터답지 않게 하늘이 맑았다. 습도도 적당히 있어 기분 좋은 상쾌함까지 더해졌다.

비틀즈와 폴의 앨범을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학창시절부터 그들을 팔로우했기에, 리버풀은 언제나 오고 싶은 도시였다. 운전으로 한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한 리버풀의 첫인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갈하고 아기자기했다. 도시 곳곳에서 리버버드와 클롭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캐번클럽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관광객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조금은 한산한 펍에서 낮술을 때리면서 여행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우리 주변엔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 노인 둘, 개를 데리고 온 중년의 아저씨, 노부부 등 다양한 연령대의 현지인이 있었다. 그들이 펍을 즐기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게다가 한낮에 뉴캐슬과 웨햄 경기라니, 이 무슨 호사인가. 펍 문화는 너무너무 부럽다.





리버풀은 예상보다 ‘개미지옥’ 같은 곳이었다. 바이닐 숍, 스포츠웨어 숍, 눈이 번쩍 뜨이는 러쉬 매장까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결국 비틀즈 관련 명소 몇 곳은 스킵해야 할 정도였다. 점심도 늦게 먹었는데, 브라질식 고기 뷔페 레스토랑이 신기했고 맛도 훌륭했다.





시간에 쫓겨 도착한 안필드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마을과 넓은 공원 옆에 자리 잡아 정감 있었다. 맨유 팬들이 흔히 말하는 ‘지저분하고 후진’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손길이 많이 닿아 더 반짝였고, 경기 없는 날에도 팬들이 찾아오는 ‘사람 냄새 나는’ 그런 곳이었다.
무엇보다 탐나는 건… 샵. 나이키 스폰서라 그런지 옷이 너무 예뻤다. 푸마에 비해 훨씬 비쌌지만. 나이키를 사랑하는 남편은 리버풀 팬도 아니면서 열심히 쇼핑을 했다. 사실 나도 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남편이 “너한테 잘 어울린다”며 자꾸 사주려 해 흔들렸지만—그때 깨달았다. 아름다움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 나의 순도 100% 팬심을. (그래도 안필드 샵에서 챔스 카드는 하나 샀다.)



안필드에서 차로 5분이면 도착하는 구디슨 파크 앞을 지나, 리버풀의 아름다운 해 질 녘 풍경을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만 머무는 것이 아쉬워, 맨체스터에 있는 동안 한 번 더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녁 식사는 매키메이어에서 해결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어디든 사람이 많았고, 이곳 역시 활기찼다. 음식은 그저 그랬지만 분위기는 ‘불금’ 그 자체였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쌌다. 내일이면 남편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남편이 아일라섬에서 일주일간 모아온 수많은 위스키와 잔들을 바라보며, 나도 남은 여행 동안 나만의 덕질을 실컷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I’ll never walk alone. 내일부터 혼자가 되지만, 덕질이 있는 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남은 일정이 설레고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