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talk

영국은 세 번째이지만, 곁다리가 아닌 메인 여행지로 삼고 싶었기에 맨체스터에 오는 걸 그동안 벼르고 별렀다. 시간과 총알 모두 여유 있을 때 오고 싶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피티를 받으며 몇 달간 체력도 키웠다. 그리고 드디어 맨체스터에 “도착해 버렸다.” 짐이 매우 매우 늦게 나왔다. 그래도 짜증 나지 않았다. 계속 설렜다. 무거운 짐을 끌고 나오니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게 무슨 그림인가? ㅋㅋ 노묘를 키우느라 함께 장기간 여행하기는 어렵지만, 이번에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어 이 또한 좋았다. 맨체스터 공항에 픽업하러 와주어 고맙고, 기특하다고 오빠를 마구마구 칭찬해 줬다. 힘든 비행 끝에 편히 숙소에 가게 되어 어찌나 좋던지. 하나 안 좋았던 건 공항 파킹 비용. 파운드 물가를 실감했다.

여행 오기 전까진 나도 영국에서 운전을 해보고 싶었지만, 옆 좌석에 앉아 시뮬레이션해보니 안 하는 게 낫겠더라. 공항 빠져나오는 첫 번째 로터리에서 이미 사고 났을 거다. 열흘이 넘도록 우측 운전을 하고 다닌 남편을 믿고, 창밖을 마음껏 구경했다. 집착 수준으로 맨체스터의 자료를 찾아보는 내게, 오빠는 그렇게 많이 알고 가면 설렘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한순간도 그렇지 않았다. 이 촌 동네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와 습하고 차가운 공기, 길가에 잔뜩 피어있는 수선화, 새소리, 빨간색 벽돌 건물. 이 모든 게 특별하지 않아도 황홀했다.

한숨도 못 잤지만 찡얼거릴 여유가 없었다. 새벽 6시에 맨체스터에 떨어졌는데, 투어 시간을 8시로 예약했기 때문이다. 숙소에 가자마자 씻고 바로 택시를 타고 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갔다. 여유가 없었던 까닭은 오빠와 둘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48시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체력도 안 좋고, 여행하면 나무늘보 스타일이라 빠르게 움직이는 일이 없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이 도시가 처음인 주제에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에티하드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형용사도 필요 없이 좋았다. 그냥 엄청 엄청 좋았다. 미디어로 수없이 봐 온 장소인데도 좋다는 감정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투어 후기는 백 개는 족히 읽어 보았을 텐데도 지루함 없이 신났다. 특히, 터널에 입장하자마자 느낄 수 있었던 녹진한 잔디 향기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잔디 향기를 병에 담아오고 싶었다.

스타디움 투어가 생각보다 재밌다던 남편은, 그제야 아스날과의 경기를 못 보게 된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맨체스터시티 팬도 아니고, 축구보다 야구를 더 좋아하는 남편은 갑자기 경기를 보지 못하는 것에 미련이 생겼다며 샵에 가더니 미친 듯이 쇼핑했다. 나는 지난 시즌에 실패한 홈 셔츠에 로드리를 마킹하고, 파격 세일 중인 운동복을 샀다. 쇼핑을 끝내고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첨엔 비가 내리는 줄도 몰랐다. 이 비로 말할 것 같으면 천만 개의 스프레이를 내 얼굴에 뿌리는 느낌이다. 빗줄기도 안 보이고, 빗소리도 안 나는데도 옷이 금세 다 젖어서 신기했다. 비를 피할 데도 없고 둘 다 그냥 멍하니 서서 다 맞았다ㅋㅋㅋ

예약한 레스토랑엔 걸어 가기로 했다. 뉴이슬링턴의 예쁜 건물과 아름다운 캐널을 지나 ERST에 도착했다. 숍도 손님들도 모두 멋졌다. 한 접시를 시키면 코딱지만큼 나와서 이것저것 시켰는데, 가격 보고 눈을 감았다. 여행와서 돈 신경 쓰지 않기로. 돈은 또 벌면 되니까. 저녁 식사는 TAST로 예약했다. 펩 감독님이 투자한 까탈루냐 레스토랑이다. ㅋㅋㅋㅋ 그러니 가야겠지? 식당 앞 LED 디스플레이에는 맨체스터시티 경기 광고가, 식당 바로 앞에는 리암갤러거의 프리티그린 1호점이, 식당 옆 건물에는 오아시스 갤러리가, 내가 지금 있는 곳은 펩 소유의 레스토랑이라니… 천국이 별거 있나? 바로 이곳이지. 펩 식당 왔으니 문어 요리는 필수(?). 메뉴 5개 정도 주문하고, 오빠는 메뉴에도 없는 굴 달래서 굴 껍데기에 위스키를 부어 마셨다. 하루키가 먹는 방식이라고…. 나도, 옆 테이블 사람들도 그 요상한 퍼포먼스에 씁쓸한 박수를 보냈다.

식사 후, 산책하며 도시를 구경했다. ERST에서 본 사람들 말고, 진짜 맨체스터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놀라웠던 것 1. 샘스미스처럼 치장한(수염에 진한 화장+남자의 체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3부 레깅스…. 혹은 초미니 니트 스커트+하이힐) 게이가 매우 많았다. 2. 사람들이 추운데 민소매 패션으로 밖에서 식사한다. 3. 펍이 무진장 많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즐거울 것 같단 기대가 생긴다. ㅎㅎㅎ

내가 한 달살이를 해야 한다면, 바로 여기야. 추우면서 습하고, 사람들은 위어드하고. 퍼펙트 하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