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talk

여행지에서 매일 보게 될 비인데,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역시 나는 날씨 악마인가 보다. 여행을 떠나면 설레고 들뜰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몇 주 전부터 계속된 스트레스 때문인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보리가 2주 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남편과 나 모두 집을 비운 4일 동안 보굴이가 편히 지낼 수 있을지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3주간의 긴 여행 일정도 마음을 짓눌렀다. 내가 직접 계획한 여행인데, 이렇게 불안해하는 게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데, 문 앞에서 배웅하던 보리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어젯밤 내 옆에서 자던 굴비는 뒤척이는 내 손을 콱 물고는, 아침이 되어 떠날 때까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큰 집사는 이미 열흘 전 집을 떠났고, 작은 집사인 나까지 큰 캐리어를 들고 나가니—보리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참치캔을 먹지 못한다는 것을. 그 실망스러운 눈빛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 여행은 철저히 컨셉을 지켜야 했으므로 이티하드 항공을 탔다. 이티하드 전용 라운지는 한국에 없어서 아시아나 라운지로 안내받았다. 라면을 먹고 싶지는 않았는데, 안 먹고 가면 서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컵라면을 결국 뜯었다. 시간이 꽤 많이 남아서, 리디북스에 담아온 블루자이언트를 보았다. 이번 여행을 위해 그동안 읽지 않고, 아껴둔 만화책이다. 모든 시리즈를 담아왔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덕질” 그 자체다. 팬심 하나로 이티하드를 골랐지만, 다음에 유럽이나 중동을 간다면 아마 에미레이츠를 탈 것이다(남편은 에미레이츠를 탔는데, 너무 좋았다고). 이티하드는 예상대로 미디어도 볼 게 없었고, 음식도 평범했다. 매트리스는 180도 펴진다고 했지만 헤드 부분이 꺾여 있어서 불편했다. 결국 잠은 한숨도 못 자고, 웹서핑을 하거나 태블릿으로 베컴 다큐멘터리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와인, 맥주, 샴페인을 번갈아가며 마셨다.

아부다비에 도착하자마자 졸음이 몰려왔지만, 트랜스퍼까지 3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는데 결국 실패. 이티하드 라운지에서 맛없는 중동 음식을 하나씩 맛보며 축구 뉴스를 보고 있는데, 오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남편이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 8시간 넘게 운전해서 드디어 맨체스터 숙소에 도착했다고 했다. 피곤했을 텐데, 도시다운 풍경이 반가웠는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내가 좋아할 만한 사진들을 보내왔다. 지쳐 있던 눈앞에 그 사진들이 뜨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게이트에서 짐 검사를 마치고 탑승하려는데, 비즈니스와 이코노미 구분도 없이 질서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 ‘이제 유럽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맨체스터행 비행기는 훨씬 작았고, 히말라야 산맥을 지나 중동을 벗어나기 전까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고, 다크서클은 입술 가까이까지 내려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죽지만 않고 착륙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짬짬이 지도를 외우고, 남편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두 시간 후면 맨체스터에 도착한다.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친다. 두-근.